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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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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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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에 대해 이야기하다
목표는 "총합 소설"
――하루키 씨에게 있어서 소설을 쓴다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소설을 쓴다,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경험하지 않은 일의 기억을 더듬다"는 작업이에요. 좀 더 쉽게 말하면, 당신이 미경험의 롤 플레잉 게임을 한다, 하지만 그 게임을 프로그램한 사람은 당신 자신인 거에요. 그러나 그 기억은 게임을 하는 당신의 인격에게서는 잃어져 있다. 다른 한 편에서는 그것을 프로그램한 당신의 인격은 게임을 하지 않는다. 그런 꽤 분열적인 작업이라고요.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고, 왼손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모르는 거지요. 그런 작업이 명확하게 분열되면 될수록 거기서 태어나는 이야기가 설득성을 가지게 된다. 요컨대 당신 속에 있는 원형에 더 가까워진다는 뜻이에요. 잘 설명할 수가 없지만.

그러니까 요컨대, 물론 저의 경우 말이지만, 처음부터 결론이 준비되어 있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데서 제로부터 이야기를 세워 가는 데 의미가 있는 거에요. 결말이 뻔한 스포츠 시합과 같이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에는 의미가 없어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꼭 의미있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는 확신은 있어요. 그러니까 그곳에 있을 결론에 어떻게 다다를 것인지,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지요.

――장편과 단편, 하루키씨에게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해변의 카프카>는 처음 반년 동안에 초고를 써낸 다음, 또 반년을 들여서 고쳐 썼어요. 머리 부분부터 다 고쳐 쓴 건 다섯 여섯 번이었을까요. 제법 힘든 작업이지요, 즐겁지만.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정돈이 된 것을 이번에는 편집자에게 보여 주고 OK란 말을 들으면 게라(교정쇄)로 만들지요. 게라가 된 후에는 세부를 철저하게 고쳐 쓰는 일을 해요. 이것도 일단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제가 원래 고쳐 쓰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버려 두면 언제까지나 하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끝을 맺어야 되잖아요. 얼마든지 고쳐 쓸 수는 있지만 끝을 맺기에 적당한 곳이라는 게 있고, 그것을 잘 보고 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에요. 단편이라면 원칙적으로 어디까지나 고쳐 쓰면서 완벽한 문장으로 만들어 가야 해요. 번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얼마든지 닦을 수가 있지요. 하지만 장편 소설의 경우, 문장을 닦아 내는 작업을 너무 많이 하다가는 독자에게 읽기 어려운 문장이 되고 말아요. 장거리니까 적당하게 훅하고 힘을 빼는 부분도 필요한 거에요.

저는 챈들러의 <롱 굿바이>를 셀 수 없을 만큼 몇 번이나 읽었는데 지금도 머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란 꽤 조잡하고 쓸데없는 부분들이에요. 장편 소설엔 그런 부분이 필요하다는군요. "뭐 괜찮지"라는 식의 미지근한 부분이 말이지요. 좋은 장편 소설엔 독자와 인간적인, 깊은 관계를 가지는 부분이 있고, 거기서는 인간과 같이 어느 정도 결점이라는 것이 필요해요. 너무 결점만 많으면 아무도 상대를 안 해 주겠지만(웃음).

비치 보이즈의, 라기보단 브라이언 윌슨의 <Pet Sounds>도 그렇지요. 오래 듣고 있으면 "이거야말로 명곡!"하는 트랙보다 맥없는 "뭐야 이거"하는 트랙이 이상하게 머리에 남아서 개인적인 애착을 느끼게 되더군요. 제 소설에도 그런 부분이 있었으면 해요. "잘 모르겠지만 이 부분이 미지근하고 난 좋아.."라는 식으로.

――이 소설을 쓰고 나서 지금 어떤 느낌이세요?

더 앞으로 갈 수 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그것은 지금까지 장편을 쓸 때마다 느껴 온 거지만. 아직 나아갈 여지가 있다. 그것을 채워 갈 수 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만족감은 있지만 납득하지는 않았어요. 언젠가 더 큰 것을 쓰고 싶어요.

이번 소설을 쓰면서 생각한 것은, 제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제가 만들어낸 인물들이 제법 잘 움직여 줬다는 거에요. 소년도 나카타 상도 오시마 상도 호시노 군도 사에키 상도 사쿠라도 모두 각각 physical하고 independent하게 움직여 줬다. 그런 실감이 있어요. 예를들면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나"와 쥐의 분리성이란 게 그리 확실하지 못하고 있어요. 가끔씩 혼탁하고 있고, 명확하게 나눠서 쓰지를 못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번 소설에서는 그런 voice의 definition(특정성)이 딱 되어 있아요. 오디오적으로 말하면 악기 소리의 분리가 선명하게 되어 있다. 그로인해 이 소설이 중층성(重層性)을 보이고 있는 거에요. 물론 <양을 쫓는 모험>에는 그 나름의 좋은 맛이 있고 그것은 아마도 그 시기를 지나서는 낼 수 없는 맛이겠지만, 소설가로서 언제까지나 그것을 계속하고 있을 수도 없다는 말이에요.

그것이 가능하게 된 데는 역시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의 존재가 컸어요. 거기서 철저하게 여러가지 voice를 나누어 쓰는 일을 했다. 그것이 일단 제 식으로나마 가능하게 됐다. 그 자신이 크다고 생각해요.

제가 앞으로 소설 속에서 쓰고 싶은 것은 역시 악에 대해서지요. 악이라는 것의 형태나 존재방식을 여러 각도에서 쓰고 싶네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은 소설의 스케일이나 완성도로 보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처럼 압도적이지는 못하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악이라는 게 여러가지 형태를 취하면서 대지 속에서 조금씩조금씩 배어 나오는 모양이 참 리얼하고 면밀하게 그려져 있어요. 그런 것을 저 나름대로 침착하게 시간을 들여서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요.

<태엽감는 새>에서는 "와타야 노보루"나 "보리스"같은 악의 세계에 속하는 인간들이 나오지요. 그들이 표상하는 악의 영역같은 곳도 나오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상징적이면서도 세부적으로 리얼하기도 한 악이란 것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많은 경우 악이란 것은 그것 자체가 자립한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욕심이나 겁, 상상력의 부족과 같은 그런 자질에 연결된 거에요. <악령>를 읽으면 그런 것을 잘 이해할 수가 있어요. 사소한 negativ이 집적한 그 위에 거대한 악이 있다.

소설가로서 최종적으로 쓰고 싶은 것은 역시 "총합 소설"이에요. 총합 소설이라고 하면 좀 어려운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것이 총합 소설으로서 하나의 달성이라 하겠지요. 주제넘는 말이지만 제 목표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런 소설을 언젠가 쓰고 싶어요. 욕심이 많지요(웃음). 여러 인물들이 각각 이야기를 가지고 모여와 그것이 복합적으로 뒤엉키면서 발열하여 새로운 가치가 태어난다. 독자는 그것을 동시적으로 목격할 수가 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총합 소설"이에요. 어렵지만.

저는 <태엽감는 새>라는 소설을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하고 있고 제 작품군에 있어서는 하나의 milestone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아직 제가 생각하는 "총합 소설"까지는 되지 못하고 있어요. 아직은 그 도상에 있는 거에요. 여러가지 voice가 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뒤엉키면서 발열한다는 지점까지는 가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한 필드 상에 여러가지 voice가 나타나 서로 관계해 가는데 결국 그 위치 관계가 대등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여러 인물들이 여러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모였는데 역시 일인칭인 "나"라는 화자의 존재감이 강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나"의 voice가 전체를 dominate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부분이 반성점이에요.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홀수 장과 짝수 장을 일인칭과 삼인칭으로 나눠서 쓰고 있어요.

――마지막에 독자에게 메시지를.

이 <해변의 카프카>란 소설에 대해서는 ―― 다른 소설에 대해서도 그건 다 마찬가지지만 특히 이 소설에 대해서는 ―― 저는 별로 해석 같은 것을 안 하고 싶어요. 말로 하나하나 해석해 버리면 많든 적든 거짓이 될 것이고 의미도 없으니까. 물론 이건 작자의 입장에서 말해서, 말이지만요. 저러서는 독자 여러분이 해석 같은 것 없이 총체로서의 이야기를, 정경을 되도록 그대로의 형태로 받아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려운 질문을 받아서는 저도 잘 모를 테니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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