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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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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인터뷰
BACK NUMBER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에 대해 이야기하다
소설가가 사회에 commit하기 위해서는
――<해변의 카프카>는 투명한 물 같은 문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그렇게 말해 주니까 기쁘네요. 나카타 씨도 저런대로의 사람이니까. 자연체라고나 할까요. 문장이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되도록 방해하지 않도록, 이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보다는 나오는 사람들이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게 하려고요.

――<언더 그라운드>에서 픽션이라는 필드가 아닌 현실의 사회라는 것에 대해서 하루키 씨는 정면으로 해후하셨다고 생각해요. 그것과 이번 작품이 어딘가에서 관계되는 부분이 있을까요?

현실의 사회를 현실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대단히 힘든 일이지요. 그 정도는 사실로서 누구나 알고 있고, 물론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힘든 일의 구체적인 세부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것과는 또 별차원의 문제인 거에요. 카와이 하야오(河合準雄 :일본의 임상심리학자) 선생님이 자주 하시는 말인데,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남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다"는 것은 전혀 별 차원의 일이라고요. 카와이 선생님을 보고 있다가도 그냥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와는 눈매가 싹 달라지더군요. 얼굴도 다른 얼굴이 되고 말지요. 몸의 전체에서 살기가 느껴져요. 그만큼 다르단 말이에요.

저는 1년 동안 실컷 <언더 그라운드>의 일을 해 봐서 그런 것을 참으로 잘 이해할 수가 있었어요. 진지하게 남의 이야기를 듣는 일의 무서움 같은 것 말이에요. 그런 체험은 좀처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게다가 거기엔 사람의 생사가 걸려 있는 거니까요.

제가 인터뷰를 한 상대의 대부분은 부지런히 꼬박꼬박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아침마다 만원 전차를 타고 회사에 다니며 열심히 일하다가 늘 잔업도 하고, 또 다시 만원 전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거에요. 편도 2시간이나 걸린다는 사람도 있어요. 집에 들어오니까 아이들은 벌써 밥을 다 먹고 자고 있지요. 아내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기운도 없고요. 제가 보기에는 그런 것은 꽤 "비인간적인" 생활이에요. 그러나 그것을 "참 비인간적인 생활이군요"라고 저는 당연히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제게는 없는 거지요. 그런 것이 사회적인 시스템으로서 현실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저도 그 시스템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러한 사회적인 시스템에 대해서 직선적으로 "No"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대로 시원시원하고 기분 좋은 일이겠지만, 어쩌면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 옴 진리교 지도자)적인 세계로 가 버린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그런 석연치 않은 위화감과 함께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요컨대, 그렇게 간단하게 흑백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위화감을 우리 각각이 자신의 일부로서 받아들여 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저는 어느 시점부터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 위화감을 자신 속 어느 부분에 위치시키는가에 따라 우리의 위치가 정해지지요. 귀결점을 어디서 찾는가의 말이지요. 생각하면 할 수록 어려운 문제이지만, 저도 소설을 쓰면서 이야기의 차원에서 그 "귀결점"을 모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는 "사회와의 commitment"란 것은 구체적인 정치참가를 한다든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요. 소설가로서 사회의 구조 속에 유기적으로 끼워지고 actual하게 기능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도 사회적 commitment의 하나의 중요한 형태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일 수도 있는 거에요. 아사하라가 제출한 것과 같은, 매혹적이면서 위험성을 포함한 이야기성에 대항할 만한, 다른 가치를 가진 이야기성을 제출하는 것. 그것도 우리 소설가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들 중 하나인 것 같아요. 그런 시점에서 사물을 보지 않으면, "현실적인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소설가에는 정당한 정치성, 사회성이 없다"는 극단적인 결론이 나올 수도 있을 거에요.

――사회성이라는 의미에서, <해변의 카프카>에는 그런 것이 단순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신화성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사물을 논리적으로, 언어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을 원래 잘 못하는 편이에요. 못한다기보다, 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요. 원래 머리도 별로 좋지 않거든요.

예를들어 <언더그라운드>의 일을 해서, 그것이 제게 준 것의 무게나 의미를 누군가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에요. 만약에 그것을 했다면 그건 상당히 위선적인 것이 될 거에요. 다소간에 말만의 것이 되고 말지요. 사람 마음 속에 똑바로 닿지는 않을 거에요. 신문사의 인터뷰를 받으면서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제 속에 허무감과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르지요. 무력감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것은 제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이란 아마도 그것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라는 새로운 땅으로 옮겨 놓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이야기적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는 일. 거기에 있는 vision을 픽션 총체에 확 새겨 놓는 거에요. 예로서는 좀 이상하지만, 레인 맨이 바닥에 흩어진 구슬을 셀 때, 우선 거기에 있는 풍경을 움직이지 않는 vision으로 자기 머리 속에 확 새겨 놓지요. 하나 씩 숫자를 세지는 않고요. 소설가는 그것과 거의 같은 일을 해요. 요컨대 사물을 다른 회로로 던져 버려 놓고, 그 회로가 가진 특정한 생리를 통해서 사물을 이해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것이 픽션화란 거에요.

신화라는 것도 요컨대 다른 동시적 회로인 거에요. 신화라는 원형회로가 우리들 속에 원래 세트되어 있고 우리는 가끔씩 그 원형회로를 통해서 동시적으로 사물의 vision을 이해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픽션은 어떤 경우에는 신화의 필드에 똑 들어가 버리지요. 이야기가 원래적인 이야기로서의 기능을 다하면 다할수록 그것은 더더욱 신화에 가까워진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분열증적인 세계에 가까워진다고 할 수도 있을까요?

그런 뜻에서 제 소설은 기본적으로 해석하기에 맞지 않는 데가 있지 않을까요. 세간에는 제 소설에 관한 해설서가 많이 나와 있는 모양인데, 그런 것도 그 이유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뭐 자만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해요. 저는 제 속에 있는 원형 같은 것을 하나 씩 분석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돌처럼 삼키면서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결국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쓰고 있는 거지요. 그런 감각이 어느 정도까지 독자에게 전해지고 있는지 저 자신으로선 잘 모르겠지만요.

다음 회에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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